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처음 보는 유언장이 나왔는데, 작성 날짜가 치매 진단을 받고 한참 지난 시점이라면 — 남은 가족의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치매 진단 이후에 작성된 유언장 효력은 두 개의 관문에서 판가름 납니다. 하나는 유언 당시에 유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는가(유언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민법이 정한 방식을 지켰는가입니다. 둘 중 하나만 무너져도 유언은 효력을 잃습니다.

이 글은 실제 대법원 판결의 사안을 바탕으로, 등장인물과 세부 사정을 각색해 재구성한 사례 이야기입니다.

병상에서 만들어진 유언장 — 전 재산을 한 사람에게

박 씨(가명)는 말기 암으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력이 쇠해 식사를 하지 못했고, 부축 없이는 일어나 앉지도 못했습니다. 간병하던 큰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 있었고, 천장에 걸린 전깃줄을 보고 뱀이라고 말하는 등 헛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박 씨의 병실에 변호사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재혼한 배우자가 미리 재산 내역을 적어 온 쪽지를 건넸고, 변호사 한 사람이 그 쪽지의 내용에 따라 유언서에 들어갈 내용을 하나씩 불러 주었습니다. 박 씨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음”, “어” 하는 정도의 답을 했을 뿐, 자신의 뜻을 문장으로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내용을 받아 적어 유언서를 만들고 낭독한 뒤, 박 씨는 부축을 받아 반쯤 일어나 앉은 상태로 서명했습니다. 유언의 내용은 모든 재산을 재혼한 배우자에게 남긴다는 것 — 전혼에서 낳은 아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공교롭게도 그 아들 쪽 가족이 없는 시간에 마련되었고, 박 씨는 이틀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배제된 아들 쪽 가족은 유언이 무효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그런데 1심과 2심 법원은 유언이 유효하다고 보았습니다. 간단하게나마 소리를 내어 답했으니, 말로 유언의 취지를 전달한 것(“구수”)으로 볼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대법원의 답 — “음”, “어”만으로는 유언이 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결론을 뒤집었습니다. 대법원 2006. 3. 9. 선고 2005다57899 판결은, 다른 사람이 미리 작성해 온 서면에 따라 질문을 하고 유언자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음”, “어”라고 답하는 방식은 — 유언 당시 유언자의 의사능력과 유언에 이르게 된 경위에 비추어 그 서면이 유언자의 진의에 따라 작성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인정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 법이 요구하는 “유언 취지의 구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유언은 무효가 될 처지에 놓였고, 사건은 다시 심리하도록 돌려보내졌습니다.

이 판결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법원은 “법이 정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하더라도 무효”라고 선언합니다. 민법 제1060조는 유언이 법이 정한 방식에 의하지 않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제1065조는 그 방식을 자필증서·녹음·공정증서·비밀증서·구수증서의 다섯 가지로 한정합니다. 위 사안에서 사용된 구수증서 방식(제1070조)은 질병 등 급박한 사유가 있을 때 말로 유언을 남기는 방식인데, 바로 그 “말로 전달”이라는 핵심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본 것입니다. 고인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와 무관하게, 방식의 문턱에서 유언이 무너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거의 같은 장면인데, 유효로 인정된 유언도 있다

그런데 몇 해 뒤, 비슷해 보이는 장면에서 반대의 결론이 나온 사건이 있습니다. 역시 병실에서, 공증인이 미리 유언 내용을 적어 와 낭독한 사안이었습니다. 대법원 2008. 8. 11. 선고 2008다1712 판결은 이 유언을 유효라고 보았습니다. 공증인이 유언자의 의사에 따라 유언 취지를 서면으로 정리한 뒤 그 서면으로 유언자에게 질문하여 진의를 확인하고 필기된 서면을 낭독해 주었으며,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를 정확히 이해할 의사식별능력이 있었고 유언 내용과 경위에 비추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기한 것으로 인정된다면, 공정증서 유언(제1068조)의 “구수”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병상의 유언이고, 모두 다른 사람이 준비해 온 서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는 무효, 하나는 유효입니다. 결론을 가른 것은 서류의 형식이 아니라 유언 당시의 의사능력, 유언에 이르게 된 경위, 진의를 확인한 과정 같은 세부 사정들의 조합이었습니다. 유언 분쟁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사실관계 싸움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치매 진단과 유언장 효력 — 유언능력은 어떻게 판단되나

유언은 17세부터 할 수 있고(민법 제1061조), 일반 계약과 달리 미성년자·피후견인의 행위를 취소할 수 있게 하는 제한능력 규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민법 제1062조). 결국 기준은 하나로 모입니다 — 유언을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자신이 어떤 내용의 유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는가.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뒤의 유언이 자동으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진단이 없었다고 해서 유언능력이 당연히 인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증상의 정도와 기복, 유언 내용의 복잡성, 작성 경위가 함께 평가됩니다.

다만 성년후견이 개시된 뒤에는 별도의 규정이 있습니다. 피성년후견인은 의사능력이 회복된 때에만 유언을 할 수 있고, 이 경우 의사(醫師)가 심신 회복의 상태를 유언서에 부기하고 서명날인하여야 합니다(민법 제1063조). 이 요건을 갖추지 못한 유언은 효력을 다투는 소송에서 무너지기 쉽습니다.

유언 시점 원칙 실제 분쟁에서의 쟁점
치매 진단 전 유언 가능 이후의 진단을 근거로 “그때 이미 판단능력이 흐려져 있었다”는 다툼이 제기되기도 함
진단 후 · 성년후견 개시 전 유언 당시 의사능력이 있으면 가능 유언 당시의 상태, 유언 내용의 복잡성, 작성 경위를 종합해 개별 판단
성년후견 개시 후 의사능력이 회복된 때에만 가능 + 의사의 회복 상태 부기 필요(제1063조) 법정 요건을 갖췄는지가 일차 관문

이 판결들이 상속인에게 의미하는 것

유언장을 받아 든 쪽이든, 유언에서 배제된 쪽이든 확인해야 할 지점은 같습니다. 유언 당시의 의사능력을 보여주는 자료가 어떻게 남아 있는지, 유언이 어떤 경위로 누구의 주도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방식 요건이 갖추어졌는지입니다. 위 두 판결이 보여주듯 비슷한 장면도 세부 사정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당시 상태를 둘러싼 다툼은 증명하기도 방어하기도 어려워집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유언이 유효하더라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 재산을 한 사람에게 남기는 유언이 방식과 능력의 관문을 통과했더라도, 배제된 상속인에게는 유류분 반환 청구라는 별도의 권리가 남기 때문입니다. 유언 효력 다툼과 유류분은 서로 다른 제도이고 기간 제한도 달라, 어느 쪽을 어떤 순서로 다툴지는 사안 전체를 놓고 판단할 문제입니다.

핵심 요약
  • 법이 정한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부합하더라도 무효입니다(민법 제1060조).
  • 치매 진단 자체만으로 유언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며, 유언 당시의 의사능력을 기준으로 개별 판단됩니다.
  • 성년후견 개시 후에는 의사능력이 회복된 때에만, 의사가 회복 상태를 유언서에 부기해야 유언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1063조).
  • 유언이 유효하더라도 배제된 상속인의 유류분 반환 청구는 별개로 남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치매 진단을 받은 사람이 쓴 유언장은 무조건 무효인가요?
아닙니다. 유언능력은 유언을 한 바로 그 시점을 기준으로 개별 판단됩니다. 진단 사실은 중요한 자료이지만 그것만으로 결론이 나지 않으며, 증상의 정도와 기복, 유언 내용의 복잡성, 작성 경위가 함께 평가됩니다. 다만 성년후견이 개시된 뒤라면 의사능력 회복 시의 유언 + 의사의 부기라는 법정 요건(민법 제1063조)을 갖춰야 합니다.

Q. 공증(공정증서)까지 받은 유언장도 무효가 될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공정증서 유언도 유언자가 유언 취지를 말로 전달하는 “구수” 등 법정 요건을 둘러싸고 효력이 다투어질 수 있습니다. 판례는 공증인이 유언자의 진의를 확인하고 낭독하는 과정을 거쳤고 유언자에게 의사식별능력이 있었다면 유연하게 유효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의사표현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면 공증 절차를 거쳤더라도 무효로 판단된 사례들이 있습니다.

Q. 유언장이 무효가 되면 상속은 어떻게 되나요?
무효인 유언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같이 취급되므로, 그 유언이 없는 상태를 전제로 상속이 전개됩니다. 유효한 다른 유언이 없다면 법정상속분에 따라 상속재산을 나누게 되고, 협의가 되지 않으면 가정법원의 상속재산분할 절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유언의 효력, 유류분, 상속재산분할이 한 사건에서 동시에 얽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유언장의 효력이 문제되는 상황이신가요?

유언 당시의 상태, 작성 경위, 방식 요건 — 이 세 가지가 조합되면 같은 유언장도 전혀 다른 결론에 이릅니다. 본인 상황에서 무엇부터 확인해야 할지 불분명하다면, 카카오톡으로 기본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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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능력이 흐려진 가족의 재산 보호를 위한 제도 전반은 성년후견 신청 절차 글을, 후견인이 선임된 뒤의 재산 관리와 법원 허가는 성년후견인의 재산 처분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속 분쟁 전반에 대한 안내는 상속 분쟁 안내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해법률사무소 김평호 변호사 (Pyoung-ho Kim)
한국 변호사,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43기 수료.
서울가정법원 성년후견인 선임 경력. 2021년 우수변호사상 수상.
2014년 이래 민사·형사·가사 등 전 분야 누적 500건 이상의 사건 담당.

본 글은 유언의 효력과 상속 분쟁에 관한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나 의견이 아닙니다. 유언의 효력에 관한 판단은 개별 사정과 법원의 심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안은 변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