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아직 정정하실 때 “나중에 판단이 흐려지면 누가 내 재산과 몸을 돌봐야 할까”를 스스로 정해 둘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임의후견, 곧 후견계약입니다. 가족이 나중에 법원에 청구해서 시작되는 법정후견(성년후견·한정후견·특정후견)과 달리, 임의후견은 본인이 판단능력이 남아 있을 때 신뢰하는 사람을 골라 계약으로 미리 정합니다. 다만 계약서에 서명하고 공증을 받았다고 끝이 아닙니다.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본인이 정해 둔 후견인이 아니라 법원이 지정한 후견인으로 뒤집힐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실제 대법원 결정의 쟁점을 바탕으로, 세부 사정을 각색해 재구성한 사례입니다.
스스로 후견인을 정해 두었는데, 가족이 후견 심판을 청구했다
한 어르신(가명)은 아직 정신이 또렷할 때, 훗날을 대비해 믿을 만한 사람과 후견계약을 맺어 공정증서로 남겨 두었습니다. 자신의 재산 관리와 신상에 관한 일을 그 사람에게 맡기고 대리권을 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판단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자, 다른 가족이 가정법원에 한정후견 개시를 청구했습니다. 본인이 미리 정해 둔 사람 대신, 법원이 후견인을 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정면으로 부딪치는 질문이 생깁니다. 본인이 스스로 정해 둔 임의후견이 우선하는가, 아니면 가족의 청구에 따라 법원이 법정후견을 열 수 있는가. 미리 대비해 둔 계약의 의미가 이 지점에서 시험대에 오릅니다.
대법원의 답 — 임의후견이 원칙이지만, 예외가 있다
대법원 2017. 6. 1.자 2017스515 결정은 이 문제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민법 제959조의20 제1항은 “후견계약이 등기되어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은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특별히 필요할 때에만” 성년후견·한정후견·특정후견의 심판을 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대법원은 이 조항이 사적자치의 원칙에 따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후견계약을 우선하도록 하고, 예외적으로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특별히 필요할 때에 한하여 법정후견에 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원칙은 임의후견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그 예외의 문을 함께 설명했습니다. 후견계약이 등기되어 있음에도 법정후견을 열 수 있는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특별히 필요할 때’란, 후견계약의 내용, 후견계약에서 정한 임의후견인이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아니한 사유가 있는지, 본인의 정신적 제약의 정도, 그 밖의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후견계약에 따른 후견이 본인의 보호에 충분하지 아니하여 법정후견에 의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를 말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 사건에서는 그러한 특별한 필요가 인정된다고 보아, 후견계약이 있었음에도 한정후견 개시가 정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결정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미리 후견인을 정해 두는 것은 강력한 자기결정이지만, 그 계약이 본인을 실제로 충분히 보호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야 우선권을 지킵니다. 계약이 부실하거나 정해 둔 사람이 그 역할에 적합하지 않으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법정후견에 자리를 내줄 수 있습니다.
임의후견(후견계약)이란 무엇인가
민법 제959조의14 제1항은 임의후견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 있거나 부족하게 될 상황에 대비하여, 자신의 재산관리 및 신상보호에 관한 사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위탁하고 그 사무에 관하여 대리권을 수여하는 계약입니다. 핵심은 ‘미리, 스스로’ 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임의후견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형식과 시점이 있습니다. 후견계약은 공정증서로 체결하여야 하고(제959조의14 제2항), 계약을 맺었다고 곧바로 효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한 때부터 효력이 발생합니다(같은 조 제3항). 즉 서명과 공증은 시작일 뿐이고, 훗날 실제로 판단능력이 떨어졌을 때 법원이 감독인을 선임해야 비로소 계약이 작동합니다. 법은 이 제도를 운영하는 모든 단계에서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같은 조 제4항).
| 단계 | 무엇을 하나 | 효력·의미 |
|---|---|---|
| ① 후견계약 체결 | 판단능력이 있을 때 공정증서로 계약(제959조의14 제2항) | 아직 효력은 없음 — 장래를 위한 준비 단계 |
| ② 등기 | 후견계약 사실을 등기 | 공시 — 법정후견과의 우선관계 판단의 전제가 됨 |
| ③ 임의후견감독인 선임 | 판단능력 저하 시 가정법원이 감독인을 선임(제959조의15) | 이때부터 후견계약의 효력이 발생(제959조의14 제3항) |
법정후견과 무엇이 다른가
가장 큰 차이는 ‘누가, 언제 후견인을 정하는가’입니다. 임의후견은 본인이 판단능력이 있을 때 스스로 후견인을 고릅니다. 반면 법정후견은 판단능력이 이미 떨어진 뒤에 가족 등이 청구하고, 후견인은 가정법원이 선임합니다. 미리 준비하는 제도인지, 문제가 생긴 뒤에 대응하는 제도인지가 갈리는 지점입니다.
| 구분 | 임의후견(후견계약) | 법정후견(성년·한정·특정) |
|---|---|---|
| 시작 계기 | 본인이 미리 계약으로 정함 | 판단능력 저하 후 가족 등이 법원에 청구 |
| 후견인 선정 | 본인이 직접 지정 | 가정법원이 선임 |
| 효력 발생 |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한 때 | 후견개시 심판이 확정된 때 |
| 감독 | 임의후견감독인이 감독하고 법원에 정기 보고 | 가정법원, 필요 시 후견감독인 |
법정후견이 실제로 어떻게 시작되고 후견인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는 성년후견 신청 절차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임의후견을 검토하는 분이라면 두 제도를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 출발점이 됩니다.
후견계약은 언제, 어떻게 작동하나
후견계약을 맺어 등기해 두었더라도, 본인이 건강할 때에는 그 사람이 마음대로 재산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임의후견은 본인의 판단능력이 실제로 부족해진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필요해지고, 그때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하면서 효력이 생깁니다. 감독인은 본인, 배우자, 4촌 이내의 친족, 임의후견인, 검사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청구로 선임되며, 원칙적으로 본인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민법 제959조의15).
임의후견감독인을 두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본인이 정한 후견인이라도 그 권한을 어떻게 쓰는지 아무도 지켜보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감독인은 임의후견인의 사무를 감독하고 가정법원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며, 법원은 필요하면 후견인의 사무나 본인의 재산상황을 조사하도록 명할 수 있습니다(제959조의16). 이렇게 ‘본인의 선택’과 ‘법원의 감독’이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임의후견의 구조입니다.
정해 둔 사람이 적합하지 않다면, 마음이 바뀐다면
본인이 정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후견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임의후견인이 될 사람이 후견인 결격사유에 해당하거나, 현저한 비행을 하거나, 후견계약에서 정한 임무에 적합하지 않은 사유가 있으면 가정법원은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하지 않습니다(제959조의17 제1항). 감독인이 선임되지 않으면 후견계약은 효력을 얻지 못하므로, 부적합한 사람을 정해 둔 계약은 이 문턱에서 걸립니다. 감독인을 선임한 뒤에 그런 사유가 생기면 법원이 임의후견인을 해임할 수도 있습니다(같은 조 제2항).
마음이 바뀌었을 때 벗어날 길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임의후견감독인이 선임되기 전에는 본인이나 임의후견인이 언제든지 공증인의 인증을 받은 서면으로 후견계약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제959조의18 제1항). 다만 감독인이 선임되어 효력이 생긴 뒤에는 아무 때나 그만둘 수 없고,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종료할 수 있습니다(같은 조 제2항). 이미 효력이 발생한 후견은 본인 보호와 직결되기 때문에, 시작보다 종료에 더 엄격한 요건을 둔 것입니다.
임의후견을 고려한다면 — 왜 ‘설계’가 결과를 가르나
앞서 본 2017스515 결정이 보여주듯, 후견계약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법원은 후견계약의 내용과 임의후견인의 적합성, 본인의 상태를 종합해 그 계약이 본인을 충분히 보호하는지를 따지고, 부족하다고 보면 법정후견을 엽니다. 결국 대리권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지, 재산관리뿐 아니라 신상보호까지 담을지, 감독 구조를 어떻게 짤지, 가족 사이의 이해충돌을 어떻게 미리 조율할지가 계약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같은 ‘후견계약’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그 내부 설계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반대의 상황도 있습니다. 이미 가족이 법정후견을 청구한 국면에서 “본인이 미리 정한 임의후견이 우선한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그 계약이 본인 보호에 부족하다고 다투는 일은 법리와 사실관계가 촘촘히 얽히는 영역입니다. 어느 쪽이든 문서 한 장으로 정리되지 않으며, 본인의 진정한 의사와 이익이 무엇인지를 법원 앞에서 설득하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미리 준비하는 단계에서든 이미 분쟁이 시작된 단계에서든, 임의후견은 전문가의 손을 거쳐 설계하고 다투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임의후견(후견계약)은 판단능력이 있을 때 스스로 후견인을 정해 두는 제도로, 반드시 공정증서로 체결해야 합니다(민법 제959조의14).
- 계약을 맺었다고 곧바로 효력이 생기지 않고,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한 때부터 효력이 발생합니다.
- 등기된 후견계약은 법정후견보다 우선하지만, 본인 보호에 충분하지 않으면 법원이 예외적으로 법정후견을 열 수 있습니다(제959조의20, 대법원 2017스515 결정).
- 임의후견인이 부적합하면 법원이 감독인 선임을 거부하거나 해임할 수 있고, 계약 철회·종료에도 시점별로 요건이 다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후견계약(임의후견)은 공증만 받으면 바로 효력이 생기나요?
아닙니다. 후견계약은 공정증서로 체결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자체로 곧바로 효력이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본인의 판단능력이 실제로 부족해진 뒤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한 때부터 비로소 효력이 생깁니다(민법 제959조의14 제3항). 공정증서 작성과 등기는 장래를 위한 준비 단계이고, 감독인 선임이 실제 작동의 출발점입니다.
Q. 가족이 성년후견을 청구하면, 미리 맺어 둔 후견계약은 소용이 없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후견계약이 등기되어 있으면 법원은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특별히 필요할 때에만 법정후견 심판을 할 수 있어, 원칙적으로 임의후견이 우선합니다(민법 제959조의20 제1항). 다만 대법원 2017스515 결정처럼, 후견계약에 따른 보호가 충분하지 않다고 인정되면 예외적으로 법정후견이 개시될 수 있습니다. 계약의 내용과 정해 둔 후견인의 적합성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Q. 후견계약에서 정한 사람을 나중에 바꾸거나 계약을 취소할 수 있나요?
시점에 따라 다릅니다. 임의후견감독인이 선임되기 전에는 공증인의 인증을 받은 서면으로 언제든지 후견계약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959조의18 제1항). 그러나 감독인이 선임되어 효력이 발생한 뒤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종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해 둔 임의후견인이 임무에 적합하지 않으면 법원이 감독인 선임을 거부하거나 해임할 수 있습니다(제959조의17).
부모님, 또는 나 자신의 노후를 미리 준비하고 계신가요?
후견계약은 대리권의 범위와 감독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훗날 법원에서 인정받는 힘이 달라집니다. 이미 가족 사이에 후견을 둘러싼 다툼이 시작된 경우에도, 어느 방향이 본인에게 유리한지부터 짚어야 합니다. 카카오톡으로 기본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카카오톡으로 상담 문의하기판단능력이 저하된 가족을 위한 제도 전반은 성년후견 신청 절차 글을, 여러 가족이 후견인 자리를 두고 다툴 때 법원이 누구를 선임하는지는 후견인 선임 기준 글을, 후견인이 재산을 처분할 때 필요한 법원 허가는 성년후견인의 재산 처분 글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법 분야 전반의 안내는 가족법 안내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해법률사무소 김평호 변호사 (Pyoung-ho Kim)
한국 변호사,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43기 수료.
서울가정법원 성년후견인 선임 경력. 2021년 우수변호사상 수상.
2014년 이래 민사·형사·가사 등 전 분야 누적 500건 이상의 사건 담당.
본 글은 임의후견(후견계약)과 성년후견 제도에 관한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나 의견이 아닙니다. 후견계약의 설계와 후견 심판의 결과는 개별 사정과 법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안은 변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