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나 지적장애로 판단능력이 흐려진 가족이 큰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은 대개 한참 뒤에야 알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위해 법이 마련해 둔 길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의사무능력 계약 무효의 법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년후견 개시 이후에 주어지는 취소권(민법 제10조)입니다. 두 길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투는 방법과 난이도가 전혀 다릅니다.

이 글은 실제 대법원 판결의 사안을 바탕으로, 등장인물과 세부 사정을 각색해 재구성한 사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날아온 8,800만 원의 대출 독촉장

진우 씨(가명)는 지적장애 3급으로 등록된 성인 남성입니다. 일상적인 대화는 어렵지 않게 주고받았지만, 복잡한 일의 처리는 늘 가족의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어느 날 집으로 금융회사의 독촉장이 날아왔습니다. 진우 씨 명의로 8,800만 원의 대출이 실행되어 있었고, 원리금이 연체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족이 확인해 보니 대출의 명목은 굴삭기 구입자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우 씨는 굴삭기를 운전해 본 적도, 운전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대출 서류에 첨부된 굴삭기운전자격증은 나중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출금은 진우 씨의 손에 들어온 적조차 없이 굴삭기 판매업자에게 곧바로 지급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진우 씨를 앞세워 대출을 일으킨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정황이었습니다.

가족은 소송에서 “계약 당시 진우 씨에게 의사능력이 없었으므로 대출약정은 무효”라고 다투었습니다. 그 무렵 법원은 진우 씨에 대해 한정후견을 개시했고, 그 심판 절차에서 이루어진 정신상태 감정에서는 지능지수 52, 사회연령 9세 수준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만 아래 설명에서 다루는 성년후견의 취소권은 이 판례 사안의 한정후견 쟁점과는 별개의 제도라는 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항소심까지, 법원은 왜 가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뜻밖에도 항소심까지 법원은 금융회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진우 씨가 계약 당시 “인지·판단능력이 현저히 결여되어 독자적으로 자기 의사를 결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인 언행에 뚜렷한 어려움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 벽이 된 것입니다.

이 지점이 바로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가족들이 부딪히는 벽입니다. “우리 가족이 그 계약을 이해했을 리 없다”는 확신만으로는 부족하고, 법원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 행위 당시의 상태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의 답 — 겉모습이 아니라 “그 행위를 이해했는가”

대법원은 원심을 뒤집었습니다. 대법원 2022. 5. 26. 선고 2019다213344 판결은 의사능력을 “자기 행위의 의미나 결과를 정상적인 인식력과 예기력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나 지능”이라고 정의하면서, 의사능력의 유무는 구체적인 법률행위와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특별한 법률적 의미나 효과가 부여된 행위라면 일상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 법률적인 의미나 효과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의사능력이 인정된다고 판시했습니다.

특히 위 판결은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의 경우 “단순히 그 외관이나 피상적인 언행만을 근거로 의사능력을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의학적 진단이나 감정으로 확인되는 장애의 정도, 그 법률행위의 구체적인 내용과 난이도, 행위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 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와 경위가 합리적인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결론이 달라집니다. 8,800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고, 담보가 얽힌 대출의 구조는 당시 진우 씨의 지적능력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며, 자격증을 위조하면서까지 대출을 받을 동기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대법원은 진우 씨가 계약 당시 의사능력이 없어 대출약정이 무효라고 볼 여지가 많다며 사건을 다시 판단하라고 돌려보냈습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였는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 계약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가 기준이라는 선언입니다.

치매 부모의 증여·매매라면 — 의사무능력 계약 무효를 다투는 길

위 판결의 법리는 지적장애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민법 제9조는 성년후견개시의 요건으로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을 정하고 있고, 치매 등 노령에 따른 판단능력 저하에서도 의사능력의 유무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 자주 만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치매가 진행되던 부모가 특정 자녀나 지인에게 부동산을 증여했고, 다른 가족들은 등기가 넘어간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때 증여가 부모의 진정한 뜻이었는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의사능력입니다. 다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한 모든 행위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능력은 행위별로, 그 행위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진단서 한 장이 아니라 당시의 의무기록·감정 결과·행위의 난이도와 경위를 아우르는 정교한 입증 구성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자료의 확보는 어려워지므로, 어떤 사정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갖는지는 사안별 판단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성년후견이 개시되어 있었다면 — 민법 제10조의 취소권

문제의 계약 이전에 이미 성년후견이 개시되어 있었다면 검토의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민법 제10조 제1항은 “피성년후견인의 법률행위는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성년후견이 개시된 이후의 법률행위라면, 의사무능력 무효와 별도로 제한능력자 취소권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한정후견의 경우에는 가정법원이 정한 동의 필요 행위인지 등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므로, 후견 유형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행위가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용품 구입처럼 일상생활에 필요하고 대가가 과도하지 않은 행위는 취소할 수 없고(제10조 제4항), 가정법원이 본인의 잔존능력을 존중해 취소할 수 없는 행위의 범위를 따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제10조 제2항). 취소권에는 기간 제한도 있습니다. 민법 제146조에 따라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 법률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안에 행사해야 합니다.

주의할 점은 이 취소권이 성년후견 개시 이후의 행위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후견 개시 전에 이미 이루어진 증여나 계약으로 소급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벌어진 과거의 행위는 의사무능력 무효로 다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은 성년후견 개시로 막는 것 — 이 두 축이 함께 검토되어야 합니다. 성년후견 제도의 큰 실익 중 하나가 바로 이 예방 기능에 있습니다.

무효와 취소, 무엇이 다른가

구분 의사무능력 무효 피성년후견인 행위 취소 (민법 제10조)
적용 시점 후견 개시 여부와 무관 — 개시 전 행위도 대상 성년후견 개시 이후의 법률행위
핵심 쟁점 그 행위 당시 의사능력이 없었다는 점의 사후 입증 취소가 제한되는 행위인지 여부(일상 행위, 법원이 정한 범위)
기간 무효 주장 자체에는 기간 제한이 없으나, 증거 확보는 시간에 민감하고 반환 청구에는 별도의 시효 문제가 생길 수 있음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 행위일로부터 10년 (민법 제146조)
효과 처음부터 효력 없음 취소 시 처음부터 무효로 간주 — 다만 제한능력자 측의 반환 범위는 현존이익 한도 (민법 제141조)

이 판결이 가족들에게 의미하는 것

위 판결이 가족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겉보기에 멀쩡했다”, “본인이 직접 서명했다”는 사정만으로 계약의 효력이 확정되지 않습니다. 등기가 이미 넘어갔거나 대출이 실행된 뒤라도 다툴 길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 그 길은 자동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하급심과 대법원의 결론이 갈렸다는 사실 자체가, 같은 자료를 두고도 사건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대편의 입장도 있습니다. 계약이나 증여의 효력을 지켜야 하는 쪽 — 거래 상대방이나 증여를 받은 가족 — 에게도 의사능력의 개별 판단 법리는 방어의 근거가 됩니다. 결국 어느 쪽이든, 행위 당시의 상태를 보여주는 자료와 행위의 경위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는지가 사건의 향방을 좌우합니다.

저희 여해법률사무소는 서울가정법원이 선임한 성년후견인으로서 후견 실무를 직접 수행해 왔고, 후견 개시 심판과 그 이후의 재산 관리·분쟁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다루어 왔습니다. 판단능력이 흐려진 가족을 둘러싼 분쟁은 법리 못지않게 가족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어느 입장에 서 있든, 초기에 방향을 정확히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핵심 요약
  • 의사능력은 행위별·개별 판단이 원칙 — 치매·지적장애 진단만으로 모든 행위가 무효가 되지는 않지만, 겉모습이나 서명만으로 유효가 확정되지도 않습니다.
  • 대법원은 외관이나 피상적 언행만으로 의사능력을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되고, 감정 결과·행위의 난이도·책임의 무게·경위의 합리성을 세심하게 살피라고 판시했습니다.
  • 성년후견 개시 전의 행위는 의사무능력 무효로, 개시 이후의 행위는 민법 제10조의 취소권으로 다투는 구조입니다.
  • 취소권은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 행위일로부터 10년 내에 행사해야 하고(민법 제146조), 무효 주장도 증거 확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집니다.
  • 성년후견 개시는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리는 수단이 아니라 앞으로의 재산을 지키는 예방 장치이므로, 과거 행위에 대한 다툼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치매 진단이 있으면 계약은 자동으로 무효가 되나요?

아닙니다. 의사능력은 그 행위 당시를 기준으로, 행위별로 개별 판단됩니다. 진단 사실은 중요한 자료이지만 그것만으로 결론이 나지 않고, 행위의 난이도와 책임의 무게, 행위에 이른 경위가 함께 평가됩니다. 반대로 장애 등록이나 진단이 없었다고 해서 의사능력이 당연히 인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년후견이 개시되면 그 전에 맺은 계약도 취소할 수 있나요?

민법 제10조의 취소권은 성년후견 개시 이후의 법률행위에 적용됩니다. 개시 전에 이루어진 계약이나 증여는 취소권이 아니라 의사무능력 무효의 법리로 다투어야 하며, 이때는 행위 당시 의사능력이 없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됩니다. 두 경로는 입증의 구조가 달라 초기에 방향 설정이 필요합니다.

계약을 무효로 하거나 취소하면 이미 오간 돈은 어떻게 되나요?

성년후견 개시 이후의 법률행위를 취소하는 경우에는 민법 제141조에 따라 처음부터 무효인 것으로 보며, 제한능력자의 반환 범위는 현존이익 한도로 제한됩니다. 반면 의사무능력을 이유로 처음부터 무효라고 다투는 경우에는 부당이득 반환, 등기 회복, 돈의 흐름 등 별도 쟁점이 함께 검토됩니다.

가족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계약·증여를 뒤늦게 발견하셨나요?

행위가 이루어진 시점, 당시 상태를 보여줄 수 있는 자료, 성년후견 개시 여부 — 이 세 가지의 조합에 따라 열려 있는 길이 달라집니다. 본인의 상황에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불분명하다면, 카카오톡으로 기본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변호사가 사정을 듣고 방향을 안내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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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후견 제도를 처음 검토하는 단계라면 성년후견 신청 절차 — 후견 유형 선택부터 후견인 선임까지 글을, 후견인 선임을 둘러싼 가족 간 다툼은 누가 성년후견인이 되는가 글을, 선임된 후견인의 재산 처분과 법원 허가는 성년후견인의 재산 처분 글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법 전반은 가족법 안내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해법률사무소 김평호 변호사 (Pyoung-ho Kim)
한국 변호사,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43기 수료.
서울가정법원 성년후견인 선임 경력. 2021년 우수변호사상 수상.
2014년 이래 민사·형사·가사 등 전 분야 누적 500건 이상의 사건 담당.

본 글은 의사능력과 성년후견 제도에 관한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나 의견이 아닙니다. 법률행위의 효력에 관한 판단은 개별 사정과 법원의 심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안은 변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