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실제 대법원 판결의 사안을 바탕으로, 등장인물과 세부 사정을 각색해 재구성한 사례 이야기입니다.
결혼 9년 차의 어느 아내는, 남편이 “해외 사업”을 이유로 집을 비우는 날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남편은 필리핀과 태국을 오가며 몇 달씩 들어오지 않았고, 그동안 생활비는 거의 보내지 않았습니다. 두 아이의 학원비도, 매달 빠져나가는 관리비도, 결국 아내 혼자 감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성병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남편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부정행위를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외도가 의심되는데 증거가 없으면, 그래도 이혼이 될까.” 많은 분들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행위 증거 없이 이혼을 청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국 법원은 어느 한쪽의 잘못을 콕 집어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부부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깨졌다고 인정되면 이혼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판단은 생각보다 섬세하고, 위자료·재산분할까지 함께 보면 더 복잡해집니다.
- 배우자의 부정행위를 직접 증명하지 못해도, 혼인관계가 회복할 수 없이 파탄되었다면 민법 제840조 제6호(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로 이혼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 법원은 한 가지 사건이 아니라 신뢰의 훼손, 가정에 대한 무관심, 부양·양육 책임의 방기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파탄 여부를 판단합니다.
- 다만 파탄의 책임이 청구한 사람에게 더 무겁다고 인정되면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고, 위자료·재산분할은 이혼 인정과는 또 다른 판단을 거칩니다.
부정행위 증거 없이 이혼,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부부는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할 의무가 있습니다(민법 제826조 제1항). 이 의무는 혼인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바탕에는 애정과 신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쪽이 가정을 오래 비우고, 생활비를 주지 않으며, 상대에게 깊은 불신을 안긴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앞의 사례와 닮은 사안에서 대법원은 2022년 5월 26일 선고한 2021므15480 판결로 그 기준을 분명히 했습니다. 대법원은 남편의 부정행위가 증명되지 않았더라도, 아내가 성병에 감염되어 남편을 의심하게 된 사정은 부부 사이 신뢰가 훼손될 수 있는 사정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남편이 해외 체류를 반복하면서 가정을 소홀히 하고, 경제적 지원과 자녀 양육의 공동책임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었던 점을 함께 고려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혼인관계는 남편의 책임 있는 사유로 애정과 신뢰가 상실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되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한데도, 이를 달리 본 원심(2심)에는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보아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돌려보냈습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위 판결은 남편의 행위가 곧바로 “악의의 유기”(제2호)에 이르렀다고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가정을 등한시하고 양육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은 사정 등을 더하면 제6호의 중대한 사유에 해당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본 것입니다. 어느 한 조항의 요건을 완벽히 채우지 못하더라도, 여러 사정이 겹치면 파탄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위 판결은 일반론으로 “부부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되었다면, 그 책임이 청구한 사람에게 더 무겁다고 인정되지 않는 한 이혼 청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준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민법이 정한 여섯 가지 이혼 사유
민법 제840조는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사유로 여섯 가지를 정하고 있습니다. 제1호부터 제5호까지는 비교적 구체적인 사유이고, 제6호는 그 밖의 사정을 폭넓게 담는 일반 조항입니다.
| 조항 | 사유 | 실무에서의 의미 |
|---|---|---|
| 제1호 |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 | 간통에 한정되지 않는 넓은 개념이나, 입증이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 제2호 | 배우자의 악의의 유기 | 정당한 이유 없이 동거·부양·협조 의무를 저버린 경우로, 주관적 요소까지 따집니다. |
| 제3호 |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의 심히 부당한 대우 | 폭행뿐 아니라 지속적 폭언·모욕 등도 문제될 수 있습니다. |
| 제4호 | 자기의 직계존속에 대한 배우자의 심히 부당한 대우 | 내 부모에 대한 배우자의 학대 등이 해당합니다. |
| 제5호 | 3년 이상 생사 불명 | 연락 두절과는 구별되는, 생사 자체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
| 제6호 |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 | 제1~5호에 딱 들어맞지 않아도, 신뢰 상실·장기 별거·경제적 무책임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파탄을 인정하는 일반 조항입니다. |
제6호의 파탄 여부를 가릴 때 법원은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 파탄의 원인에 누구의 책임이 있는지, 혼인 기간과 자녀의 유무, 당사자의 나이, 이혼 후의 생활 보장 등 혼인관계에 관한 여러 사정을 두루 살핍니다. 그래서 같은 “별거”나 “생활비 미지급”이라도, 그 배경과 경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집니다.
이 판단이 의뢰인에게 의미하는 것
이 지점에서 많은 분들이 안도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증거가 없어도 이혼이 된다”는 말은 절반만 맞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어느 한 조항을 완벽히 입증하지 못해도 혼인이 실제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이혼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지, 아무 자료 없이 주장만으로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법원은 결국 “이 혼인이 회복 가능한지”를 여러 사정의 무게를 달아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 무게를 다투는 일이 재판의 본질입니다.
상대방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가정을 비운 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거나, 생활비를 보냈다거나, 오히려 청구한 쪽에 파탄의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청구한 사람의 책임이 상대방보다 더 무겁다고 인정되면, 같은 사실관계라도 청구가 기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겪은 일”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사정들이 법이 말하는 파탄의 무게에 어떻게 닿는지를 설계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이 부분은 사안마다 달라서, 같은 듯 보이는 두 사건의 결론이 정반대로 갈리기도 합니다.
이혼이 인정되는지와는 별개로, 위자료와 재산분할은 또 다른 판단을 거칩니다. 위자료는 혼인 파탄에 책임 있는 배우자가 그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는 것이고, 재산분할은 부부가 함께 이룬 재산을 청산하는 것이어서 성격이 다릅니다. 최근 대법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대법원 2025년 9월 4일 선고 2025므10730 판결은, 부부가 함께 이룬 재산의 주요 부분을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처분해 가정의 경제적 기반을 형해화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행위 역시 제6호의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부정행위 같은 전형적 사유가 아니더라도, 경제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파탄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재판상 이혼, 절차와 기간은 어떻게 흘러가나
협의가 되지 않을 때는 가정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실무상 조정을 먼저 거치지 않고 곧바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도 많고, 소송이 진행되는 중에 법원이 화해를 권고하기도 합니다. 사건의 난이도에 따라 다르지만 재판상 이혼은 대체로 소송 제기부터 약 8개월에서 1년 6개월 정도가 걸리며, 재판 기일에는 대부분 변호사가 대리해 출석하고 당사자는 재판부가 요청하는 경우에 한해 출석합니다.
배우자가 외국인이거나 외국에 머물고 있는 경우에는 한 겹이 더해집니다. 어느 나라 법원이 재판할 수 있는지, 서류를 어떻게 송달할 것인지, 상대방이 본국에 둔 재산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가 함께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한국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유형이 아니어서, 같은 쟁점을 청구와 방어 양쪽에서 다루어 본 경험이 사건의 방향을 잡는 데에서 차이를 만듭니다. 저희 사무소는 국내 부부의 재판상 이혼은 물론 국제이혼과 국제이혼 재산분할 사건을 양측 입장에서 모두 수행해 왔습니다.
증거가 있는지, 별거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지, 배우자가 국내에 있는지 — 이 사정들이 조합되면 결과의 경우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내 상황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면, 기본 사정을 먼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배우자의 외도를 의심하지만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이혼할 수 있나요?
부정행위(제1호)를 직접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신뢰의 훼손과 장기 별거, 부양·양육 책임의 방기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혼인이 회복할 수 없이 파탄되었다고 인정되면 제6호로 이혼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정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갖는지는 사안마다 달라, 결론을 미리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Q. 제가 먼저 집을 나왔는데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나요?
집을 나온 사정과 그 경위가 중요합니다.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더라도, 그 파탄의 책임이 청구한 사람에게 상대방보다 더 무겁다고 인정되면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견디기 어려운 사정에서 부득이하게 나온 것이라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어, 사실관계 전반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Q. 배우자가 외국에 있거나 외국인입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이혼할 수 있나요?
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한국 법원이 재판할 수 있는지(국제재판관할), 외국에 있는 배우자에게 서류를 어떻게 송달할지, 본국 재산을 어떻게 다룰지가 함께 문제됩니다. 이런 사건은 전적으로 한국어로 진행되고 절차가 길어지기 쉬워, 경험 있는 변호사와 처음부터 방향을 잡는 것이 시간을 가장 적게 잃는 길입니다.
여해법률사무소 김평호 변호사 (Pyoung-ho Kim)
한국 변호사,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43기 수료. 대한변호사협회 이혼 전문 변호사 등록. 2021년 우수변호사상 수상. 2014년 이래 민사·형사·가사 등 전 분야에 걸쳐 누적 500건 이상의 사건을 담당했습니다.
본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같은 듯 보이는 사안도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정은 변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여해법률사무소 — 이혼·가사 및 국제결혼 사건 상담.